Der arme Aschenbach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은 진짜 끝났다. (영화관에서) 본문
시작은 별 거 없었다. 1학년 겨울방학에 유럽 여행 실컷하고 새해에 빈둥빈둥 놀다가, 침착맨 유튜브 영상 중에 '이카리 신지처럼 행동하는 법'을 보고, 주인공이 저렇게 우울해 하는 만화는 도대체 뭐지 하면서 보기 시작했다. 일단 무엇을 하기 전에 사전조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로서 나무위키를 읽기 시작했고, TV판 먼저 보고 극장판을 봐야한다고 하길래 군말 없이 따랐다. 초반에는 보면서 잔 적도 있는데, 뭔가 계속 보게 되는 매력이 있었다.
계속 보게 된 것은 환경적인 요인도 있었다. 한창 보는 중간에 이 나태한 삶을 운전면허를 따면서 청산하고자 3일 속성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괜한 가오를 부려서 1종 보통으로 등록했고 나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셔틀 봉고차를 타고 하루종일 학원에 있다가 해가 다 지면 다시 셔틀을 타고 돌아왔는데, 학원에서의 하루 일과를 마치면 그렇게, 무슨 담배를 하루 종일 못 펴서 금단현상이 일어나는 것 마냥, 에반게리온이 보고싶어지는 것이었다. 3일 속성에 제일 싼 곳을 찾다보니 다른 지역에 있는 학원이었고, 집에서 거리가 꽤 되었다 보니 그 좁디좁은 봉고차 안에서 기어변속과 클러치로부터의 스트레스를 가득 흡수한 채 에반게리온을 느긋하게 볼 시간이 충분했던 것이다. 그때 본 에반게리온이 왜 그렇게 재밌었는지, 거의 지옥 같았던 운전면허 학원을 다니는 기간의 한 줄기 빛이었다.
고생 끝에 운전면허를 따고 나서도 남은 에피소드를 홀린 듯이 봤다. 딱 TV판만 다 봤을 때쯤, 완전히 매료된 나는 바로 극장판을 어떻게 봐야하는지 찾아봤고, TV판 다음으로 이어지는 게 사도신생이길래 보려고 했더니 뭔가 복잡... 너무나도 여러 버전이 있었고, 근본충인 나는 완전한 오리지널을 볼테다 하고 겨우 찾아서 봤다. 사도신생을 다 보고 EOE를 보려고 하는데, 웬걸, 내가 방금 봤던 사도신생 후반부랑 너무 똑같은 것이다. 내가 지금 미쳤나? 아니면 클릭을 잘못했나? 싶어서 여러번 나갔다 들어갔다 했는데, 똑같아서 다시 나무위키를 뒤져보니, 사도신생의 rebirth 부분은 EOE의 초반부와 겹친다는 것이었다. 어쩐지, 넷플릭스에서는 DEATH(TRUE)^2, 즉 rebirth 부분은 없고 death 부분만 있는 것을 보니, 역시 대기업이라 합리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구나 했다. 내가 똑같은 내용을 또 봐야한다는 생각에 믿기지가 않아서(미야자키 하야오가 말했던 것처럼, 같은 작품을 다시 보는 것은 엄청난 시간낭비라고 생각한다) EOE를 다시 재생하지 못하고 나무위키 페이지에만 죽치고 있었는데,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것이 개봉...날짜 였다. 여기서 또 내가 미친 건가 싶었다. 일본 개봉 날짜는 1997년 7월 19일, 미국 개봉 날짜는 2002년 8월 14일, 이와 어울리지 않게 태극기 옆에 쓰여진 날짜는 2024년 1월 17일이었다. 일주일 전 한국 개봉? 심지어 재개봉도 아니었다. 어디서 개봉하는지 보니 메가박스. 바로 다음 날로 가장 가운데 자리에 예매해버린 후, EOE가 재생 중지 되어있던 창을 얼른 꺼버리고, 노트북도 꺼버리고. 내일 최상의 컨디션으로 영화를 보기 위해 바로 잠자리에 누웠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내가 봤던 침착맨의 그 영상은 2022년 4월 30일에 올라왔던 영상인데, 뭐 한국 개봉에 맞춘 영상도 당연히 아니고. 개봉한 시기에 맞춰 다시 알고리즘에 올라왔나?라고 추측해볼 순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꽤 오래 침착맨 영상을 봐왔던 사람인데 22년도에 이 영상을 보지 않고 그제서야 봤던 것도 참 우연스럽다. 그리고, 에반게리온을 봐야겠다고 다짐한 후 TV판을 다 본 시기가 개봉 및 상영 시기고... 더해서, 내가 정말 제대로 극장판에 대해 조사했다면 오리지널 사도신생을 보지 않고 DEATH(TRUE)^2를 본 후에 바로 내 방구석 그 자리에서 노트북으로 EOE까지 봐버렸겠지. 근데 다시 찾아보는 와중에 개봉 정보도 알아버렸고. 정말 소름이다 소름이야.
보통 영화관 갈 때 CGV나 롯데시네마를 갔지 메가박스에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 기회에 우리 지역에 하나 뿐인 메가박스에 가보기도 하고 참 별일이 다 있다 싶었다. 가보니 무슨 리미널 스페이스인 줄 알았다. 사람은 한 명도 없는데 불은 다 켜져있었다. 멈춰있는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올라가 상영관에 도착하니 남자 한 명이 문 앞에 서 있었다. 표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아 그냥 관람객이었다. 상영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문은 닫혀 있고 표를 확인하는 사람도 없으니 그냥 서 있었던 것 같은데, 왜인지 그 순간 대담해졌던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 남자도 따라 들어왔다. 들어왔으니 자리에 앉긴 앉았는데, 웃긴게 안에 아무도 없고 광고도 안 나오고 있어서 들어와도 되는지 갑자기 의문이 들어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었다. 그 남자만 안 따라왔으면 됐는데, 나 때문에 같이 들어왔는데 내가 다시 나가는 것도 이상하고... 그래서 내린 결론은 겉옷을 벗어 자리에 두고 화장실 갔다 오는 척 해야겠다. 였다. 레전드 하여자... 그래도 다행인 것은 화장실 가서 거울만 보고 다시 들어오니 광고가 틀어져 있었고, 나는 쓸데 없는 고민을 하는데 뇌를 최대로 굴렸구나 싶었다.
영화가 시작됐는데 그래, 이건 내가 봤던 오리지널 사도신생의 후반부지. 하며 혼자서 아는 체를 했다. 아는 부분을 다 보니 스탭롤이 나오면서 Thanatos OST가 나왔는데, 난 아직 rebirth 부분밖에 못 봤는데 끝난 줄 알고 뭔가 잘못된 줄 알았다. 왜냐면 나는 rebirth가 끝나고 잠깐의 장면 전환인 줄 알았는데 스탭롤이 5분동안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냥 지금까지 내가 이해한 영화 구성이 엉터리인 줄 알았다. 시계를 보기 전까지는 나갈까도 고민했었다. 하지만 시계를 보니 영화 끝나는 시간보다 훨씬 앞이었고(그럴려고 산 애플워치였다), 같이 들어온 그 남자(결국 그 영화관에는 그 남자와 나 둘 뿐이었다)도 움직이지 않길래 20%의 의심을 남긴 채 계속 앉아있었더니 EOE 부분이 시작되었다. 이 미묘한 상황 때문이었는지, 반복적이고 붉은 스탭롤 장면 때문이었는지, 지금도 Thanatos OST를 들으면 뭔가 기분이 묘해진다. 마저 본 EOE는 그야말로, 음, 일단 나는 영화를 보면서 울었는데, 감동적이어서 운 것도 있지만, 이 명작을 내가 이 큰 스크린으로 개봉시기에 맞춰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감격적인 이유도 있었을 만큼, 대작이었다. 그냥 겨울방학에 운전면허 1종 보통을 딴 것보다 더 잘 한 일이었고, 솔직히 에반게리온보다 더 뛰어난 애니 시리즈는 없을 것 같아서 지금까지도 다른 애니를 본 적이 없다. 내가 생각하는 명작의 기준은 영화를 보고난 후 계속 머리에 남고,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어 일상생활을 100% 온전하지 않아야 하는데, EOE는 충분히 그러했다. '안 본 눈 삽니다' 이런 드립 별로 안 좋아하는데, 난 정말 EOE 안 본 눈을 사고 싶다.
EOE를 본 후에 신극장판도 보려고 했지만, 리빌드여서 그런지 뭔가 재미도 없고... 손이 안 갔다. 그리고 애초에 의도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제작진이 신극장판을 엔터테인먼트 영상으로서 만들었다고 하니, 또 근본충으로서 별로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안 봤다. 나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끝은 EOE이다.
인스타에 지나가면서 간혹 뜨는 게시물로 '당신의 여자친구/남자친구가 다음 애니메이션을 인생작으로 꼽는다면 당장 도망치세요: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같은 내용이 있는데, 도망치려면 도망치시려든지. 나는 2024년 스포티파이 연말정산에서 가장 많이 들은 곡으로 4위에 '잔혹한 천사의 테제'가 있었을 뿐이다.
*번외로, EOE 볼 때 Komm, susser Tod가 나오는 장면에서 사람들로 꽉찬 영화관과 빈 영화관의 영상이 나오는데, 일본 현지에서는 꽉찬 영화관 장면이 나왔을 때 헉. 했겠지만 나는 빈 영화관이 나왔을 때 헉. 했다... 영화관의 상황이 영화의 의도와 맞진 않았지만(안노 히데아키도 예상 못 했을 것이다) 나는 나 혼자 보는 것 같았고 좋았다.